보도자료

물리학에 자신감 심어준 청암과학펠로십- 2기 최재원(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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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자신감 심어준 ‘청암과학펠로십

 

최재원/ 2기 청암과학펠로·KAIST 물리학과


 

 

“왜 하필 물리학이 자네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는가?”

 

대학원 입학 면접에서 한 교수님이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온화한 인상과 잘 어울리시던 노교수님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질문을 꺼내 나름대로 답을 찾아보곤 한다.

 

흔히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다르면 잘하는 것을 하라고들 한다. 그런 관점에서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도대체 내가 어쩌다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물리학 역사는 그야말로 집착의 역사였다. 과학고등학교 시절 일반물리학에서 C와 F를 맞을 만큼 물리를 지독히도 못하는 아이였다. 그럴수록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하는 오기로 공부하다 보니 물리가 논리정연하고 아름다운 체계를 가진 매력적인 학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KAIST에 입학해서 전공을 정할 때, 딱 1년만 열심히 물리를 공부해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똑똑한 동기들만큼 좋은 학점을 받지는 못했지만 물리학의 매력을 더 느끼고 싶어 전공 선택을 결심했다.

 

고학년 때는 미국 박사과정 입학을 준비했는데, 중요한 과목에서 그만 좋지 않은 성적을 받았다. 크게 낙담한 나머지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친구들과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다음 날 밀린 숙제를 하려고 교과서를 읽다 보니 또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2년 뒤 결국 미국 대학원 입학에 실패하고 몇 달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고민 끝에 ‘난 물리를 잘 못하니까 이젠 정말 다른 길을 찾아야지’ 생각했다.

 

그러다 현재 지도교수인 김은성 교수님이 발견한 ‘초고체’에 관련된 리뷰 논문을 우연히 찾아 읽게 됐고, 큰 재미를 느껴 충동적으로 김 교수님의 랩(lab)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분이 바로 몇 년 전 나를 낙담하게 한 과목을 가르친 교수님이라는 것은 꽤 흥미로운 반전이다.

 

랩에 들어간 후 초고체 연구계획을 세워 청암과학펠로에 지원했다. 4년 전 펠로에 선정됐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가 생생하다. 물리를 공부하면서 처음 대외의 인정을 받은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암과학펠로는 물리학을 전공하는 모든 국내 박사과정 신입생 중 매년 두세 명만 받는 영예가 아닌가.

 

재미있는 것을 적어도 ‘친구들만큼은’ 하려고 했던 노력, 유학이라는 동기부여를 받고 1년간 51학점을 듣느라 그 좋아하던 농구도 포기했던 시절, 연구 경험을 쌓느라 1년간 한 번도 순천 집에 내려가지 못한 시간에 대한 보상이었다. 가장 힘들 때 자신감을 심어준 선물이며, 오랫동안 믿고 기다려준 부모님께 신뢰를 드린 계기이기도 하다.

 

지난 4년간 나의 청암과학펠로 생활은 여느 드라마 결말처럼 상투적인 해피엔딩이라곤 할 수 없다. 연구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순탄치 못했다. 초고체를 둘러싼 연구 동향은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너무도 빠르게 흘러갔다. 덕분에 펠로에 지원할 때 세운 연구계획은 2년 만에 틀어졌다. 대학원 시절 꽃이 될 것 같았던 일본 그룹과의 협력 연구도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연구는 더디게 진행됐고, 계획한 실험을 모두 마치지 못했다. 계획대로라면 지난 8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학회에서 박사과정 동안 했던 다양한 실험 결과를 하나로 아우르는 멋진 발표로 피날레를 장식해야 했는데, 고작 첫 번째 실험 결과를 발표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옛날처럼 그저 낙담하지는 않는다. 앞에 놓인 길은 여전히 안개에 휩싸여 잘 보이지 않지만, 뒤를 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이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힘들었던 시간도 있지만 처음 4.0점을 받은 학기, 생애 첫 논문, 목표한 실험을 2년의 시도 끝에 성공한 순간처럼 즐거운 추억도 많다. 청암과학펠로로 선정되던 순간도 그중 하나다.

 

연구가 잘되지 않을 때면 이렇게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이제는 힘든 순간을 버텨내면 즐거운 추억이 새로 생길 거라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

 

오늘도 많은 대학생이 ‘적성’ ‘진로’ 같은 단어들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다. 누구와 견주어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시류와 다른 자신만의 특별함을 가지고 싶어한다.

 

혹자는 적성에 꼭 맞는 일을 찾으면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기 마련이고, 그런 일을 찾기 전까지 현실과 타협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 강의를 들으며 달콤한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잠시. 곧이어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간극, 안정과 도전 사이의 갈등, 꿈과 현실의 대비가 머릿속을 채운다.

 

나에게 일생 동안 기억에 남을 질문을 던지신 백발의 교수님은 몇 년 전 은퇴하셨다. 만약 지금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그런 적성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또 천직이라는 것,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재능을 가진 듯 금방 배워 잘하게 되는 적성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첫눈에 반하는 이상형과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듯,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가도 다시 보면 소소한 재미와 보람이 있어 즐거운 추억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게 천직이 아니겠느냐고.

 

물론 그런 즐거운 시간이 자주 오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청암과학펠로십은 나에게 그걸 알려준 뜻밖의 선물이자 자신감을 심어준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